포페 [454834] · MS 2013 · 쪽지

2018-07-15 00:3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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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오르비언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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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말 놓을게. 어차피 서로 나이도 아는데.


미리 밝히지만 이 편지를 쓰는 건 절대 너를 원망한다든지, 나를 좋아해달라든지 그런 시답잖은 얘기나 하기 위함이 아니야. 그러니 부담갖지 않아도 돼. 다만 끝까지 읽어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고 싶어.



고백하건데, 너가 처음 쪽지 보낸 그 날로부터 며칠 뒤 내 생일에 나는 이 세상을 등 지려 했어.


나로서는 오리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지금을 살고 있는 셈이지.


너하고 쪽지로 솔직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며, 내가 품은 생각에 공감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더라.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이렇게까지 나를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다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어. 참 오랜만에 기뻤던 것 같아.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내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계속 쪽지를 주고 받으며 너에 대해 알아가고, 그러면서 내 인생을 돌아보기도 했지.


그러다가 알게 되었어. 나는 더 살고 싶어한다는 걸.

이대로 눈을 감고 싶어하지 않는다는걸.


그러다 내 생일날이 왔어.


지난 몇 달간, 플래너의 내 생일 페이지에 간직해두었던 유서를 들고 오전 2시 30분에 옥상으로 올라갔어.


원래대로라면 불어오는 바람에 내 몸을 맡겼을 그 시간.


바람은 예정대로 불어오고, 모두들 예정대로 잠들어 있던 그 시간.


예정에 없던 선택지를 골랐어. ‘불어오는 바람에 유서를 찢어보내고 오늘의 계획을 세운다.’


혼잣말로 “생일 축하한다.”고 되뇌고는 다시 집에 들어왔어. 생일날 나는 한 번 더 태어난 셈이지.


옥상 계단을 내려오면서 다짐했어. 이제 다시는 허튼 생각 안 하겠다고. 


그리고 나를 구해준 네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겠다고.


그런데 솔직히 용기는 안 나더라. 내가 어떻게 하면 널 도울 수 있을지 방법도 모르겠고.


떠오르는 방법이라곤 물질적인 것 말고 없었어. 그래도 그게 도움이 된다면야 기꺼이 내주고 싶었고.


기억날 지 모르겠지만, 내가 인간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을 거야.


그러다가 먼저 만나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내가 거절한 그 다음날에 내가 대면 약속을 제안했지.


내가 변덕쟁이라서? 아니. 나를 살려준 이가 누구인지, 또 그에게 보잘 것 없는 도움이라도 전하고 싶었기에.


막상 너를 대면했을 때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더라.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그저 내가 주기로 한 물건을 “이거.” 하면서 건네는 것 말고는.


그렇게 나는 내 생명의 은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음...쑥스러워서? 거의 도망쳐온 거 같아. 에잇 이불킥!!!


그래도 기분은 좋더라.


그 이후로는 점차 쪽지가 줄어들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널 또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먼저 쪽지를 보냈었지.


뭐 그 쪽지는 결국 읽히지 않았지만. 그리고 너는 탈퇴했더라고.


전혀 서운하지 않아. 네게 나는 부담이었겠다 싶어서 오히려 미안한 마음뿐이야. 


왜 그런 경험 있잖아? 지금 내 상황도 좋지 않은데다 난 저 사람이 그리 내키지 않는데 그 사람은 내게 호의를 베풀어 줘서 불편하던. 괜히 집적대는 거 같고. 나는 그런 경험이 있어서 너도 그런 상황이지 않았을까 싶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냐...


나를 살려줘서 정말 고마워. 앞으로 닥쳐올 고난 때문에 너가 간직한 생각에 회의를 품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그건 굉장히 숭고한 뜻이니까.


그리고 너는 나를 괴물로 볼 지도 모르겠고, 지금 이 글 자체가 짜증날지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꼭 기억해줘.


이 세상 누군가는, 변함없이 너를 응원한단다. 혼자서 모든 부담을 짊어지려 하지 마.


너가 선생님이 되어 키운 학생들이 가꿀 이 나라의 모습을 상상하면, 저절로 긍정의 에너지가 솟아나. 분명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세상일거야.


너가 이 글을 볼지 안 볼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이 편지를 유리병에 담아 이진수의 바다에 퐁당 던져넣어본다.


언젠가 너에게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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