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일상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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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일상에 대한 소고
1.공(空)함
눈 앞에 놓여진 수많은 일들을 그저 나는 흘려보내고 있다. 감당할 수 없기에 흘려 보낸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이미 흘려보낸 것들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침상 위에 누워 메트로놈처럼 격초로 덜덜덜거리는 선풍기의 끊임없는 회전 속에서 나는 선풍을, 또 그 선풍 속에서 나를 편안하게 하는 그러한 향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선풍의 향기 속 미립자라 해야할까? 가만히 있던 공기의 움직임들을 살결로 한껏 끽연하여 깊게 들이마쉰다. 배가 움직여 그 미립자들이 나의 복부를 팽창하고 수축하게 하는 것을 눈으로, 그리고 촉각으로 느끼면서 그 반복적인 행위 사이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생동(生動)한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볼록, 오목, 볼록, 오목.
2.무진기행(霧津紀行) -김승옥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3.너, 운명
운명의 definition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필연적이고도 초인간적인 힘. 명운(命運). 숙명(宿命).
최근 오르비에서 잇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재회한 글이 있었다. 기술이라는 것이 사람의 인연, 곧 붉은 실을 길게 늘어트려 서로 이어붙여주는 신기한 모습도 보았지만 인연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되었다. 운명론적으로 다가가야할지, 혹은 인간의 의지로 돌려야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운명론에 걸겠다. 점점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철저히 계산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너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원인과 결과를 이어붙여 어떤 곳에 모이게 되고 그곳에서 너와 나는 만나게 된다. 나는 수많은 선택들의 기로에 선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의 결과들이 너를 만나기 위한 필연적 결과라면 이 만남이 더 가치있게 되는걸까?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그저 자전하는 행성끼리 잠깐 맞닿았을 뿐이고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멀어지게 되는 그런 우연에 불과한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내가 내릴 수는 없지만, 너는 또 너만의 사유안에서 너의 세계를 만든다, 스스로의 인식이 곧 너이기에. 나는 또 나만의 세계가 있다. 각자는 각각의 세계가 있다. 나는 너의 글자 하나 하나에서 너의 세계를 본다. 너 또한 그러하겠지. 그 서로의 공집합을 투사하여 스스로를 비춰본다. 그렇게 서로의 시선에 의해 또다시 스스로의 세계에 다른 세계를 포함시키면서 우리는 맞닿아간다. 너의 시선에 의해 내가, 나의 시선에 의해 너가 정의된다. 나는 철저한 2인칭의 철학을 정립하고싶다.
2020.07.26
4.일기초
아무 것도 느끼지 않음. 그러한 무감각적 상태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시간은 언제나 울리는 자명종 소리에 깨어진다. 나는 그 자명종이 울리기전 나의 몸이 이미 울림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예측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싫다. 마치 또다른 나가 그 시계를 보고 있었다는 듯이, 나의 유일한 도피처인 잠이라는 나의 믿음을 깨트리는 듯해서 말이다. 항상 창밖에는 햇빛이 쬐어온다. 어쩌면 당연한 일 내가 세계를 보고 있다는 사실은 빛이 있기에 나도 세계를 볼 수 있음을, 아닌건가? 나를 괴롭히는 이런 온톨로지적인 잡담은 잠시 두자.
햇빛, 햇살, 혹은 무언가. 그것들의 직진성을 나는 증명할 수 있다. 햇빛을 직시하게 되면 그것은 나의 응시에 대해 어쩌면 의지를 가지고 반감이라도 가지는 듯이, 나의 의지를 누름으로서 스스로의 위상을 높이려는 듯이 그 곧게 뻗은 바늘을 내 눈에 지긋이 찔러넣는다. 고개를 돌려서야만 햇빛은 이빨을 감춘다. 그래 내가 졌다.
데카당스적인 글 투성이들, 나의 글은 영원히 아포리즘으로 남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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