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SY한 독도바다 [1005719] · MS 2020 · 쪽지

2021-11-27 23:26:36
조회수 6,231

오늘의 역사 잡지식 33 : 광개토왕비(5) 텍스트의 한계를 넘어

게시글 주소: https://m.orbi.kr/00040997516

한국 학계든 일본 학계든 중국 학계든, 신묘년조를 둘러싼 논쟁에서 간과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텍스트는 반드시 사실만을 말하는가?의 문제죠.

대부분의 역사서들이 항상 사실만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부각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래 글이라는 매체는 문맥(context)을 갖게 마련입니다.

글에서 하나의 문장을 갖고 온다면, 설령 그 문장을 완벽히 해석한다 하더라도 글 전체의 진의는 알 수 없죠.


광개토왕비도 마찬가지입니다.

광개토왕비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에 있습니다.

특히 왕릉의 앞에 세워진 비라는 특성상, 왕의 업적을 과장하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더불어, 광개토왕비의 내용은 일관적인 양상에 따라 구성됩니다.

대내외적인 환란->광개토대왕의 평정->평화의 도래

이러한 양상에 비추어 본다면, 신묘년조의 기록은 '대내외적인 환란'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한편 신묘년조는 비문의 위치상 연도 흐름에 맞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신묘년조 기록은 391년인데, 앞서 나오는 '광개토대왕의 평정' 기록은 395년의 거란 정벌, 뒤에 나오는 '광개토대왕의 평정' 기록은 396년의 백제 정벌입니다. 즉, 391년의 일이 395년과 396년의 일 사이에 의도적으로 삽입된 것입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신묘년조 기록은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삽입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제 정벌을 정당화하는데 왜 일본의 위세를 강조하였느냐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천하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구려는 천하를 크게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하여 인식했습니다.

1차적 천하 : 고구려의 직접 지배 영역

2차적 천하 : 고구려에 종속된 지역 ex) 백제, 신라, 부여 등

3차적 천하 : 외부 지역 ex) 중국, 왜 등

이에 따르면 고구려인들은 백제를 자신들의 아랫것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죠.

이 천하관에 따르면, 백제가 신라 등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속국 간의 분쟁을 의미합니다. 이는 광개토대왕이 속국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일종의 부정적 이미지로 이어질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기에 광개토왕비의 기록자들을 백제가 벌인 일을 일본이 벌인 일로 대체하였던 것입니다.

속국 간의 대립을 광개토대왕이 진압했다는 것보다는, 외부 세력에 의한 속국의 혼란을 광개토대왕이 평정하였다는 것이 광개토대왕의 이미지에는 훨씬 좋을 테니까요.

신묘년조에서 일본의 위세가 강력히 묘사된 것도 이러한 맥락의 연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 4세기경 일본의 국력은 매우 약했지만, 약한 일본에게 속국이 공격받았다는 것은 속국을 관리하지 못한 광개토대왕의 책임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본을 약소국이 아니라 백제, 신라 등을 휘어잡을 정도의 강국으로 묘사한 거죠.


이처럼 신묘년조에 대한 연구는 텍스트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함에 따라 어느 정도의 방향성이 수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요.


무엇보다 광개토왕비 연구는 그간 신묘년조에 지나치게 천착한 측면이 있습니다. 1700여자 중 17자 정도에만 주목하였으니, 전체 비문의 1%를 두고 거의 한 세기를 보낸 것입니다.

광개토왕비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신묘년조를 벗어나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역사 잡지식 1 : 서동요와 선화공주] https://orbi.kr/00037641895

[오늘의 역사 잡지식 2 : 축성의 달인 가토 기요마사] https://orbi.kr/00037667479

[오늘의 역사 잡지식 3 : 진평왕의 원대한 꿈] https://orbi.kr/00037964036

[오늘의 역사 잡지식 4 : 신항로 개척과 임진왜란] https://orbi.kr/00038174584

[오늘의 역사 잡지식 5 : 라스카사스 - 반식민운동과 노예 장려] https://orbi.kr/00038777847

[오늘의 역사 잡지식 6 : 동방의 예루살렘, 한국의 모스크바] https://orbi.kr/00039353742

[오늘의 역사 잡지식 7 : 마라톤 전투의 뒷이야기] https://orbi.kr/00039446583

[오늘의 역사 잡지식 8 : 투트모세 4세의 스핑크스 발굴] https://orbi.kr/00039547389

[오늘의 역사 잡지식 9 : 천관우-한국사학계의 먼치킨] https://orbi.kr/00039562829

[오늘의 역사 잡지식 10 : 연천 전곡리 유적] https://orbi.kr/00039716742

[오늘의 역사 잡지식 11 : 고대 문자의 보존] https://orbi.kr/00039737161

[오늘의 역사 잡지식 12 : 쿠릴타이=만장일치?] https://orbi.kr/00039810673

[오늘의 역사 잡지식 13 : 러시아의 대머리 징크스] https://orbi.kr/00039858565

[오늘의 역사 잡지식 14 : 데카르트를 죽음으로 이끈 여왕] https://orbi.kr/00039928669

[오늘의 역사 잡지식 15 : 권력욕의 화신 위안스카이] https://orbi.kr/00040043207

[오늘의 역사 잡지식 16 : 간단한 기년법 정리] https://orbi.kr/00040188677

[오늘의 역사 잡지식 17 : 4대 문명이라는 허상?] https://orbi.kr/00040209542

[오늘의 역사 잡지식 18 : 토머스 제퍼슨의 토루 발굴] https://orbi.kr/00040310400

[오늘의 역사 잡지식 19 : 그들이 생각한 흑사병의 원인] https://orbi.kr/00040332776

[오늘의 역사 잡지식 20 : 홍무제랑 이성계 사돈 될 뻔한 썰] https://orbi.kr/00040410602

[오늘의 역사 잡지식 21 : 영정법의 실효성] https://orbi.kr/00040475139

[오늘의 역사 잡지식 22 : 상상도 못한 이유로 종결된 병자호란] https://orbi.kr/00040477593

[오늘의 역사 잡지식 23 : 상나라의 청동 기술] https://orbi.kr/00040567409

[오늘의 역사 잡지식 24 : 삼년산성의 우주방어] https://orbi.kr/00040800841

[오늘의 역사 잡지식 25 : 익산이 백제의 수도?] https://orbi.kr/00040823486

[오늘의 역사 잡지식 26 : who is 소쌍] https://orbi.kr/00040830251

[오늘의 역사 잡지식 27 : 석촌동의 지명 유래] https://orbi.kr/00040841097

[오늘의 역사 잡지식 28 : 광개토왕비(1) 재발견] https://orbi.kr/00040874707

[오늘의 역사 잡지식 29 : 광개토왕비(2) 신묘년조 발견] https://orbi.kr/00040947507

[오늘의 역사 잡지식 30 : 광개토왕비(3) 넣을까 말까 넣을까 말까 넣넣넣넣] https://orbi.kr/00040958717

[오늘의 역사 잡지식 31 : 쌍팔년도] https://orbi.kr/00040959530

[오늘의 역사 잡지식 32 : 광개토왕비(4) 여러분 이거 다 조작인 거 아시죠?] https://orbi.kr/00040970430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