岳畵殺 [72210] · MS 2004 · 쪽지

2014-06-19 10:16:06
조회수 7,999

월드컵을 맞이하여, 의대 지망 삼수생 여러분께 저주를 걸어드립니다.

게시글 주소: https://m.orbi.kr/0004639792

얼마 전 큰 참사가 터진 여파가 아직도 있는지,

아니면 16강 진출에 대한 기대가 낮아서 그런지,

아니면 제가 지방에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년보다는 덜 시끌벅적한 느낌의 월드컵 시즌이 돌아왔습니다.


티비에 비친 홍명보 감독을 보면서

문뜩 12년 전, 2002년 월드컵이 떠오릅니다.

원래는 01학번으로 대학에 들어왔어야 했고,

2002년 그날에도 대학생이긴 했지만 저는 월드컵을 즐기지 못 했습니다.


01학번 때 갑자기 쉬워진 수능으로 점수 인플레가 생기면서 

평소 내신보다는 모의수능 점수가 더 좋았고 수능에 대해 자신있었던 지라

수능 점수에서 변별력이 사라지면서 서울대 공대, 연세대 의대 모두 하염없이 떨어졌고

좋은 의대지만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별로 가기 싫었던 의대에만 합격 했습니다. 


당시 수술도 받았던지라 그걸 이유로 휴학을 해 버렸고 

재수학원에서 다시 한번 도전 해봤습니다만 

이번에는 서울대 공대가 통합모집으로 컷트라인이 대폭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연대 의대 컷이 확 높아져서 

예년 같으면 연대 의대에 무난히 붙었을 성적으로 앞에 3명 남겨두고 추가 합격이 닫혀버렸습니다. 


일단 01학번 때 합격했던 의대를 다니기로 했지만, 

지금까지 공부해 왔던 게 아깝고 정말 한끗 차이로 떨어졌기 때문에 여기서 포기할 수 없더군요.

그래서 학교를 다니면서 다시 한번 시험을 쳐 보기로 했습니다. 


그 해가 바로 2002년 월드컵이 열렸던 해입니다.

그리고 월드컵이 열리는 6월은 삼수생이 가장 싱숭생숭할 시기이기도 합니다.

초반의 굳은 다짐은 흐려지고,

공부는 맨날 하던 것 반복하는 느낌이라 흥미도 없고,

이번에는 합격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고...

거기다가 밖에서는 월드컵이라고 전국이 축제 분위기고...


물론 한국 경기는 티비로 보기는 했습니다만, 

삼수생의 무거운 마음으로 저 많은 관중 사이에 껴서 응원할 기분은 나지 않았습니다. 

지방의대 다녀서 서울과 거리가 있었던 것도 한몫했고요. 

16강 진출 후 이탈리아와 일전 때 학교에서 운동장에 대형 프로젝터를 두고 응원을 할 수 있도록 했는데

8강 진출을 확정한 그 순간까지만 환호하고 바로 기숙사로 들어와서 공부를 마져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습니다.

월드컵 열기 덕분에 6월의 슬럼프를 별 의식하지 않고 넘길 수 있었고

다음 월드컵에는 대학생으로 즐겁게 즐겨야지! 라는 나름대로 목표 의식도 생겼던지라

7월부터 열공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2002년 월드컵 -> 삼수하느라 제대로 못 즐겼음

2006년 월드컵 -> 본과 2학년이라서 공부하기 바빠서 제대로 못 즐겼음 (그래도 이 때는 교수님이 시험 일정을 조정해 주신 덕분에 한 경기는 시청 가서 봤습니다.)

2010년 월드컵 -> 레지던트 1년차라서 일하기 바빠서 제대로 못 즐겼음

2014년 월드컵 -> 공보의 1년차라서 시골에 배치 받아서 티비 보는 것 빼고는 즐기기 어렵네요 ^^;;


매번 월드컵마다 본과, 레지던트, 군의관/공보의 중 제일 안 좋은 시기만 골라서 걸려버렸습니다.



만약 제가 01학번에 대학을 갔다면 

2002년 월드컵 -> 예과 2학년이니 미친 듯이 즐길 수 있었음

2006년 월드컵 -> 본과 4학년이라서 비교적 여유가 있으니 즐길 수 있었음

2010년 월드컵 -> 레지던트 3년차라서 비교적 여유가 있으니 즐길 수 있었음

2014년 월드컵 -> 공보의 3년차라서 이동 배치해서 수도권으로 온 뒤 즐길 수 있었음

이렇게 되었겠죠? 


그렇죠.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삼수생, 특히 의대 지망생인 사람은 
 
삼수한 덕분에 저랑 똑같은 길을 밟게 될 겁니다.

2018 년 월드컵은 본2 블럭 시험 러쉬에 치여서 신경도 못 쓸 것이고

2022년 월드컵은 레지던트 1년차라 잠도 제대로 못 붙이고 응급실 한켠에 누가 켜 놓은 월드컵 중계 소리나 가끔 들을 것이고

2026년 월드컵은 군의관이든 공보의든 1년차라 시골 구석에 배치 받아서 티비 빼고는 월드컵 하든지 말든지 느끼지도 못할 겁니다.

네, 그렇죠? 그렇게 될거죠?

이 글 보는 삼수생 의대 지망생 여러분들!

남들처럼 맘껏 즐기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틈틈히 티비 보면서 6월 슬럼프 잘 이기시고

저의 무시무시한 저주가 꼭 실현되길 바랍니다.

꼭!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