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엽 국어] 이동에 따른 시상전개(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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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의 공간만 있다면
하루에 백만 자를 읽을 수 있네.
1.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전개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전개는 화자가 위치한 공간을 기준으로, 그 공간이 바뀌면서 시상이 전개되는 방식이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이거나.
-신경림,
위 시는 시적 화자의 이동에 따라 ‘운동장-소줏집-장거리-쇠전- 도수장’으로 계속 공간 배경이 바뀐다. 그에 따라 시적 화자의 정서도 ‘울분과 비애-현실에 대한 체념-신명을 통한 한풀이’로 변화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시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전개
시간의 이동에 따라 시상이 전개된다면 사물이나 사건, 어떤 현상의 ‘변화’가 나타나 있어야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상전개는 크게 순행적 구성(추보식)과 역순행적 구성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순행적 구성
순행은 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으로 순행적 구성이란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는 방식이다.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을 돌려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의 잔치에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을 한다.
-박남수,
위 시는 어둠이 사라지고 아침이 오는 모습을 섬세하게 전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이 찾아와 온갖 사물들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다. 즉 활동적인 아침의 이미지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② 역순행적 구성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이 거꾸로 이동하면서 시상이 전개되는 방식이다. 주로 회상 장면이 들어가 있는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
위 시는 현재(1연)에서 과거(2,3,4연)로의 이동을 통해 한 여인이 여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즉 여승의 슬픈 과거사가 드러나 있다. 이러한 역순행적 구성을 통해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긴장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3. 시선의 이동에 따른 시상전개
시선의 이동에 따른 시상전개란 화자가 시선을 이동시키면서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을 말한다. 크게 분류하자면 상 ↔ 하, 좌 ↔ 우, 원경 ↔ 근경 등의 방법으로 나누어진다. 화자가 직접 이동하면서 변화된 공간을 표현하는 ‘공간의 이동’ 방식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
위 시의 시적 화자는 멀리 있는 ‘자하산’과 ‘청운사의 낡은 기와집’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자하산 골짜기마다 느릅나무 속잎’이 피어나는 모습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어서 영화의 클로즈 업 장면처럼 가까이 있는 ‘청노루의 눈’을 보여주면서 마침내 그 맑은 눈동자에 비친 ‘구름’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cf) 외부세계에서 내부세계로의 이동
오늘 숲길을 걸었다. 간벌을 위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올라가노라면 여기저기 흙이 무너진 곳, 새로이 흐르는 작은 개울물, 간혹 베어진 통나무를 만나곤 한다. 숲 깊이 들어가노라면 어느새 나무들의 향기에 싸이고, 이 향기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다시 베어진 통나무 더미를 만나 숨이 멎듯 발걸음을 멈춘다. 진한 향기는 베어진 나무의 생채기에서 퍼져 숲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의 상처에서도 저렇게 향기가 피어날 수 있을까?
가만히 땅에 눕는다. 옷을 벗듯 악취 나는 몸을 벗어 버리고 싶다. 생채기가 향기일 수 있는 것들의 실뿌리 파고들어 이윽고 향기일 수 있을 때까지 눕고 싶다. 붓꽃이며 복사꽃 또 노란 양지꽃 제 상처에 열심히 꽃을 피우고, 서로 다른 향기가 만드는 길을 따라 벌들이 붕붕대며 날고 있다.
-김진경,
위 시는 화자의 내면과 숲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화자가 소망하는 바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는 숲을 산책하던 중 베어진 통나무 더미에서 향기를 맡다가 문득 내면의 상처에서 풍기는 악취를 어쩌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부분은 화자의 시선이 외부 세계(자연물)에서 화자의 내면으로 이어져 내적 성찰을 드러내고 있는 장면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도 ‘시선의 이동’으로 볼 수 있다.
★ 선지의 속살
현대시에서 시간의 이동, 공간의 이동, 시선의 이동에 따른 시상전개는 빈번하게 사용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문제도 많이 출제된다. 주로 시상전개와 그 효과를 묶어서 묻는 경우가 많다.
➊ 공간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2007년도 9월 평가원)
➋ ㉠에서 ㉡으로 가면서 화자의 시선이 내면에서 외부 세계로 이동된다. (2010년도 9월 평가원)
➌ 화자가 회상의 방식으로 지난 삶을 반성하고 있다. (2011년도 4월 경기도교육청)
1. 산과 바다, 실내와 실외, 지상과 천상 등의 공간의 대비는 작품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비단 ‘공간의 대비’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대비’, ‘색채의 대비’, ‘명암의 대비’, ‘상황의 대비’, ‘인간과 자연의 대비’ 등 여러 가지 대비가 작품에 등장한다.
2. 화자가 자신의 마음이나 감정을 이야기하다가 이것과 연관된 자기 이외의 다른 어떤 대상(외부 세계)에 대해 진술했다면, 화자의 시선이 내면에서 외부 세계로 이동된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될 수 있다.
3. 회상이란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회상의 방식을 사용하게 되는 경우 시적 화자는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한 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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