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풀 때 많이들 놓치는 것
게시글 주소: https://m.orbi.kr/00067828693
2013학년도 수능 문학 문제입니다. 원래 문제의 답을 고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서, 내신st로 바꿔봤습니다. 일단 풀어봅시다.
Q. (가)의 화자의 관점에서 볼 때, 다음 밑줄 친 시어 중 시적 의미가 ㉠과 가까운 것을 모두 고르시오.
벗님네 남산에 가세 좋은 기약 잊지 마오
익은 술 점점 쉬고 지진 화전 상해 가네
자네가 아니 간다면 내 혼자인들 어떠리 <제1수>
어허 이 미친 사람아 날마다 흥동(興動)*일까
어제 곡성 보고 또 어디를 가자는 말인고
우리는 중시(重試) 급제하고 좋은 일 하여 보려네 <제2수>
*흥동: 흥에 겨워 다님.
저 사람 믿을 형세 없다 우리끼리 놀아 보자
복건 망혜(幞巾芒鞋)로 실컷 다니다가
돌아와 승유편(勝遊篇)* 지어 후세 유전(後世流傳)하리라 <제3수>
*승유편: 즐겁게 잘 놀았던 일을 적은 글.
우리도 갈 힘 없다 숨차고 오금 아파
창 닫고 더운 방에 마음껏 퍼져 있어
배 위에 아기들을 치켜 올리며 사랑해 보려 하노라 <제4수>
벗이야 있고 없고 남들이 웃거나 말거나
양신 미경(良辰美景)*을 남이 말한다고 아니 보랴
평생의 이 좋은 회포를 실컷 펼치고 오리라 <제5수>
*양신 미경: 좋은 시절과 아름다운 경치.
'남산, 승유편, 창'에 대해 판단을 하시면 됩니다. 스스로 해보시고 아래 내용을 읽어보세요.
참고로 답은 '없다'입니다.
실제 기출에서는 적절한 것을 고르라는 문제로 나왔고, 저 세 선지 중에는 정답이 없었습니다. (당시 정답은 <제2수>의 '중시'였습니다. 되게 쉽죠?)
간단하게 해설해봅시다. 일단 (가)의 ㄱ은 '세사'입니다. 단어만 들어도 그냥 느낌오듯이 속세 그 자체입니다.
(가)의 화자는 이러한 '세사'로 하여금 '험하기도 험하'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즉, 해당 문제는 속세와 같은 의미를 가진 시어를 찾으라는 문제라는 것이죠.
.............
여기서 '피램 병 형신이야?'라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입니다.
만약 이렇게 풀었다면, 살짝 위험합니다. '남산, 승유편, 창' 모두 '속세'는 아니기에 틀렸다는 식으로 해결하는 것은 '답만' 맞힌 풀이거든요.
이 문제가 물어본 것은, '(가)의 화자의 관점에서 ㄱ과 가까운 시적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속세'가 아니라 '(가)의 화자가 싫어할 만한 것'을 고르라는 문제인 것이죠.
물론 (가)가 아주 전형적인 고전시가인 탓에, (가)의 화자가 좋아하는 것은 자연이고 싫어하는 것은 속세라는 단순한 구도가 나오고, 이에 '속세와 같은 의미를 가진 시어'를 찾으라는 문제로 해석해도 결과적으론 맞는 풀이가 되지만, 정확하게 풀어낸 것은 아니게 됩니다.
나아가, 만약 속세vs자연 구도를 잡고 문제를 풀러가면 '창'이 되게 애매해집니다.
'남산'이나 '승유편'은 누가 봐도 자연 쪽 시어인 것 같은데, <제4수>의 화자는 '창'을 닫고 애나 보겠다며 자연(남산)에 놀러가자는 <제3수> 화자의 권유를 거절하고 있거든요. 단순한 속세vs자연 구도를 이용하면 자연의 반대는 속세이기에, '창'은 옳은 선지가 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문제처럼 명확한 정답이 있다면 낚이지 않겠지만, 제가 보여 드린 것처럼 선지 세 개만 가져 오면 생각보다 헷갈리는 학생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은 왜 답이 되지 않는 것일까요?
'창'이라는 단어 자체만 가지고는 어떠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제4수>의 맥락을 따져 읽어 보면 "나는 그냥 창 닫고 애기나 보면서 쉴래~"라는 의미를 추출할 수 있습니다. 즉, 여기서의 '창'은 가족과 외부의 경계가 되어 화자로 하여금 편하게 쉬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가)의 화자의 입장에서 편하게 쉬게 해 주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으니, '창'은 위 문제에서 옳은 선지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문제를 풀 때 많이들 놓치는 것, 다시 말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두 가지 요소를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발문을 통해 문제가 요구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하게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또 당연하게들 신경쓰지 않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 외에도 발문을 제대로 신경쓰지 않으면 잘못된 풀이를 하거나 아예 틀리게 되는 문제들도 꽤 많습니다.
조금 더 명료하게 정리하면, '발문을 독해하는 것 역시 수능에서의 평가 요소이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2) 모든 시어의 의미는 그 맥락을 통해 결정된다.
'창'이라는 시어는 그 자체로 window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즉, 사전적 의미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창'이라는 시어가 <제4수>라는 '맥락'을 만날 때, 그리고 이를 '독해'할 때 비로소 '외부와의 경계로 가족과 편하게 쉬게 해 주는 도구'라는 '시적 의미'가 만들어집니다. 수능 문학, 특히 운문문학에서는 이러한 '시적 의미'를 독해해내는 것 하나만 묻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의미'가 결국 '화자의 내면세계'라는, 운문문학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는 걸 깨닫는 것이 수능 운문문학 공부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겠구요.
결국 수능 국어의 핵심은 '지문, 발문, 선지를 정확하게 독해하여 의미를 추출하자.'가 되겠네요. 이 핵심을 파고들 수만 있다면, 누구의 강의를 듣든 누구의 교재로 공부하든 잘 해낼 수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별로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중요하고 기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입문 N제 2권정도 풀고 설맞이 드갈 생각인데 입문 N제 추천해주세요 6모 2컷...
-
강민철의 EBS 분석이랑 김상훈의 EBS를 부탁해 중 뭐가 더 나을까요?? 그리고...
-
4번이 아닌이유 잘 모르겠음.. 2번은 답으로 고르기 좀 생뚱맞다고 생각하고...
-
Sacrifice the Bishop!!!
-
고래 타고 다니는 거 구라인 줄 알았는데 진짜더라 아예 대중교통에 고래가 있음 근데...
-
안녕하세요. 김지헌T입니다. 문제를 풀 때 어떤 방향성으로 접근할지 결정하는 것은...
-
다들 재밌는 경제하세요 10
제발 해달라고
-
작년엔 걍 아수라 총정리과제 풀었는데 올해는 연계공부를 너무 안해서 연계되는거로...
-
1.공동체(과거) 2.공동+과두(현행 운영방식) 인 시점에서 회사의 진로에 대해...
-
수학 놓은지 3년정도 됐는데 다시 시작해보려고 하는데 수상이랑 수하부터...
-
도와주세요 8
기면증인거같아요 지난 6개월동안 예외없이 매일 5시간보다 조금 적게 자고 적으면...
-
현역이고 6모 언미영화생 백분위. 55/83/4/82/78 9모 언미영화지 백분위...
-
라이라이 단단단 2
라이라이단단단!!
-
ㅈㅂㅈㅂ 알려줭
-
국어 선지태도 0
문제를 풀다보면 선지하나의 단어에 매몰되어서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
계속 중국 경유하려고 함 어쩌지 큰일이네
-
비슷한 예로 최고의 n제 강k가 있음
-
2만원 날림 ㅅㅂ 문제 퀄 왜이럼 답도 11122333445 ㅋㅋㅋ
-
휴가 30일 전투휴무 5일 끝 어떤가요?
-
어떰?
-
.
-
67월에 끌어올려놓은감 아예 삭제됨
-
. 8
-
지구과학, 물리 진행 중인데 생각보다 재미있네요 ㅎㅎ
-
아배고파 1
응애
-
지구 수완 질문 3
해설 보니 A 왼쪽의 변성암도 B라고 해서 최소 2회 육상에 노출이라 ㄱ 틀렸다는데...
-
아무리봐도 이게 말이되나 싶네
-
우와 4
수리논술 표점 이정도 높게 받아본 적 없는듯 연대 가즈아아아
-
알려줘
-
A가 고기압인지 저기압인지 어떻게 판별해요?
-
풀 때마다 머리 싸매면서 푸는듯
-
고전시가 질문 4
부귀 위기 ㅣ라 빈천거를하오리라 에서 ㅣ를 어떻게 읽어야 하며 무슨 뜻인가요?
-
좀 잊어라
-
유튜브..? 인스타? 뭐 게임..?.?? 하심? 쉬다가 좀 지겨우면(?) 아수라 들을예정 추천좀
-
이감 풀면 시간안에 다 푸시나요?? 9평 98점인데 독서 한지문 통으로 날려버리고...
-
그렇다고 멍때리면 시간이 안가고...
-
어제 할머니댁 가서 공부했는데 아수라는 못들음.. 아수라 밀리면 안되지만.....
-
얹에서 받침이 끝소리규칙으로 ㄴㄷ이 되어서 ㄷ 때문에 뒤에가 된소리되기 된거라고...
-
단순히 단어가 어려워서?ㄴㄴ . 문맥상 그 단어의 뜻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주석을...
-
적당히 선선해지면 아 수능이구나 하는데 날씨 꼬라지 왜 이럼
-
생각보다 많은분들이 도출과정을 궁금해하셔서 도움이라도 되셨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
안하면진짜중간고사조지는겨
-
걍 이승 닷지하라는거지? ㅇㅋㅇㅋ
-
날씨 때문인가 다들 굉장히 날이 서있네요.. 긍정 회로 돌리면서 남은 두달이라도...
-
요즘 날이 더워서 24시간 내내 18도로 풀가동 했더니 감기 걸리고 목이 찢어질 거 같네요
-
나의 목표 흐흐 3
화작3 미적분1컷 영어2 사문1 세지1 흐흐
-
작년 1학기에 학교쌤이 강제로 수특 풀게 시켰을때 이후로 한번도 안함 ㅋㅋ
선생님 생각전개 잘보고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는 창을 "닫는다"는 행위를 3수의 화자의 놀자는 권유를 거절하는 행위로 보아 창 자체는
오히려 자연을 환기시키는 시어로 봤는데요,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오호 감사합니다